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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본문
성균관
고려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의 명칭을 성균관으로 바꿔 조선 시대에 이어졌다. 태학·반궁·현관으로도 불렸다. 성균관은 지배이념을 보급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함으로써 왕조체제의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성균관 입학자격은 소과 급제자인 생원·진사에 한했으나 결원이 있을 경우 사학 생도나 문음자제들도 입학할 수 있었다. 교과과정은 경사의 강의와 과문의 제술로 이루어졌으며, 사서오경은 주자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여 가르쳤다. 학생들의 관내 생활은 유교적 의례에 따랐으며 대부분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된 후 성균관에 경학과가 신설되어 역사·지리·세계사·세계지리·수학 등을 교육하였으나 한일합병에 의해 성균관의 교육은 중단되었고, 명칭도 경학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원래의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선조대와 그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성전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은 은행나무 남쪽에 있다.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4성(聖)과 제자 10철(哲), 송조 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賢) 등 모두 39위패가 동서로 봉안돼 있다. 매년 양력 5월 11일과 9월 28일, 두 차례에 걸쳐 석전제(釋奠祭)를 올린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석전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원형이 보존돼 있다. ‘공자의 나라’인 중국이 잃어버린 원형을 복원할 당시, 한국의 석전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일찍이 공자(孔子, B.C. 551~B.C. 479)는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講學)했다. 이후로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익히는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은행나무는 유학(儒學)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서원이나 향교에는 ‘학자수’라고도 불리는 회화나무와 함께 은행나무가 서 있곤 한다.
단풍이 든 은행나무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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