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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fussreise 2022. 6. 25. 12:31

중명전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King's Library)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한편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다시 재건하여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주로 쓰이다가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다. 그 후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을사늑약

1905년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만이 참석한 회의에서 강제로 체결된 조약.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무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어 각종 반대운동에 일어났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헤이그 밀사사건

을사늑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한 고종 황제는 조약의 불법과 무효를 알리기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고,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다. 3인(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 평리원 검사 출신 이준(李儁), 전 러시아 주재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李瑋鍾))의 밀사는 일본의 방해와 제국주의 국가들의 외면으로 회의 참석을 원천 봉쇄당했지만, 세계 각국의 기자와 언론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부당성을 널리 알려 국제 여론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이에 일본은 고종을 강압적으로 황제 자리에서 내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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