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ssreise

죽림동성당 (춘천) 본문

강원도

죽림동성당 (춘천)

fussreise 2021. 10. 31. 21:01

용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춘천으로 가는 길. 날씨가 너무도 좋아 정말 여행갈 맛이 났다.

 

 

 

죽림동성당 도착

 

죽림동 성당

1949년 건축된 우리나라 초창기 교회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완성도 높은 로마네스크양식의 석조 건축물로 트란셉의 설치 등이 특징적이다. 한국전쟁 때 전쟁의 피해가 많은 춘천지역에서 드물게 원형이 잘 남아 있으며, 창호의 스테인글라스 및 조각품 등 실내장식들이 건축물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춘천 지방은 천주교가 늦게 전파되어 다른 지방처럼 피로 얼룩진 박해의 교난이 없었다. 그러나 6.25 때는 공산당에 의해 성직자와 신자들을 잃는 불운을 겪어야 하였다. 6.25 전란이 터지고 남침이 시작된 바로 다음 주일인 7월 2일 구 토마스 신부가 본당 미사를 드리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성당 안에서 공포를 쏜 후 20여 명의 교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캐바난 신부와 함께 구 신부를 체포 연행했다. 소위 이 죽음의 행진으로 교황사절 방 주교를 비롯한 외국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이 끌려가 평안북도 어느 험한 산비탈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케바난 신부도 방 주교처럼 그곳에서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다.
현재의 죽림동 성당은 김유용 신부와 엄주언 말딩 회장이 이끈 곰실 공소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랫터에 보태어 구 토마스 신부가 매입한 언덕 위에 건립하고, 그 기공식은 성당벽에 라틴어로 붙어있는 초석이 말하듯이 1949년 4월 5일에 있었다. 새 성당의 건립은 구 토마스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한 지 2년 후인 1941년에 감목 대리직을 맡으면서 계획해 오던 것이지만 일제 치하의 외국인 구금 및 연금으로 착공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 그가 다시 복직하였으나 여러 가지 어려운 다시 미루다가 다행히 미군부대의 도움을 얻어 1949년에 본격 착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건축 작업은 전남 광주에서 온 '자'씨 성의 한 화교 기술자와 또 한 사람의 기술자가 맡았다. 석재는 멀리 홍천 발산리 강가에서 날라다 썼다. 그러나 거의 한 해 동안 돌로 외벽을 훌륭하게 다 쌓고 동판 지붕까지 덮고 나서 내부 공사에 들어갈 참에 6·25전란이 터졌다. 처참한 전란 중 1951년 1월 3일부터 중공군이 밀물처럼 쳐들어오자 이른바 1.4후퇴라는 참패를 당하고, 5월에는 유엔군의 반격이 있었는데 그 작전 중의 공습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짓다 만 새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 등 부속 건물이 대파되었다. 한참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성청의 지원으로 비교적 잘 진전되어 1956년 6월 8일, 춘천 교구와 죽림동 성당 주보 축일인 예수성심대축일에 새로운 모습을 갖춘 주교좌 성당의 축성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성당에 위치한 카페로 음료 가격은 본인의 마음이 닿는만큼.

 

성당 내부 모습

 

성당 뒤편 육림고개 초입에 위치한 무지개식빵으로 유명한 빵집 꼬삔이

 

가격은 비싼 편. 조그마한 식빵이 6천원.

 

'강원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춘천 세종호텔  (0) 2021.10.31
소양로성당, 춘천 혈거유지 (춘천)  (0) 2021.10.31
의암호 둘레길 (춘천)  (0) 2021.10.31
김유정문학촌 (춘천)  (0) 2021.10.29
그릇cafe 오심5 (춘천)  (0) 2021.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