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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길, 이중섭거리 (부산 범일역) 본문
범일역에서 범일동시장으로 가는 길에는 철길 위 구름다리가 있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과 유오성이 뜀박질하던 육교다. 이 다리를 건너면 지금은 사라진 삼일극장 자리로 이어진다.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에 서면 건너편에 보림극장이 보인다. 지금 건물은 다른 용도로 쓰이지만 하춘화, 나훈아, 남진 리사이틀 포스터를 그대로 간직해 순식간에 시간을 1970년대로 되돌린다.
부산 동구는 영화와 뗄 수 없는 곳이다. 동구에 극장이 18개나 있었고 여러 영화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범일동에는 삼성, 삼일, 보림극장이 있었다.
극장이 하나둘씩 문 닫은 것은 고무공장의 성쇠와 관계가 깊다. 1970년대 후반부터 공장들이 하나씩 문을 닫자 인구가 빠져나갔고 TV가 대중화되면서 극장 손님도 줄어들었다. 세 극장 모두 재개봉관으로 범일동 사람들과 애환을 나누다 이제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누나의 길
부산을 대표한 근대산업 중 하나는 신발이었다. 특히 부산 동구는 고무산업이 발전하기 좋은 천혜의 입지였다. 고무의 원료인 생고무가 들어오는 항구가 바로 앞에 있고 근처에 좌자천, 동천 등이 있어 고무 생산품을 식히는데 필요한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1923년 일영고무를 시작으로 1926년 도변고무, 1930년 대화고무 등이 동구에 세워졌다. 1934년 일본계 삼화고무(삼화호모)도 범일동에 들어섰다.
범일동 골목 시장 끝에 ‘누나의 길’이 있다. 고무공장 전성기를 이끈 곳이다. 지금은 모퉁이 대폿집이 인상적인 좁은 골목길일 뿐이지만 이때는 출퇴근시간에 몸이 부딪힐 정도로 많은 사람이 왕래했다고 한다. 골목에는 그 시절 ‘누나’의 사연이 담긴 액자가 걸려 여행자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좁은 골목길은 공장 직원들이 애용하던 지름길이다. 전성기 때는 대규모 공장이었던 삼화고무의 종업원 수가 1만여명이었다고 한다.
골목에는 신발박물관이 있다. 작은 전시관에는 소박하게 그 시절 이야기와 이 골목이 탄생시킨 히트 상품들이 전시됐다.
고무신 제조공장들은 저마다 브랜드를 출시했다. 1950년대에는 후발주자였던 왕자표고무신이 인기를 끌어 중간상인들의 줄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웃 동네인 초량동에서는 동양고무가 기차표고무신을, 진구의 태화고무는 말표고무신을 출시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 운동화 시대가 열렸고 삼화고무의 범표운동화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중섭거리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으며, 1937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온 이듬해 원산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가 된다.한국전쟁발발 후 1·4후퇴 때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온다. 우암동 피란민 수용소에서 살며 부두 노동을 하던 그는 1951년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건너갔다. 그해 12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범일동 귀환 동포마을 변전소근처에 판잣집을 짓고 생활했다.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이중섭과 마사코는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마사코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들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중섭은 가족을 떠나보낸 후 홀로 부산에 남아 낮에는 부두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술로 외로움을 달랬다.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광복동 일원의 밀다원, 금강다방, 그리고 부둣가의 술집들을 전전하며 부산으로 피란 온 예술가들과 친밀한 교분을 나눴다. 비록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며 끼니를 해결하는 가난한 화가 신세였지만 이곳에서〈범일동풍경〉이라는 명작을 탄생시킨다.범일동 553번길 주변에 조성된 이중섭거리에는 그의 고단했던 삶과 치열했던 예술 세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희망 100계단 끝 이중섭전망대에 이르면 당시 이중섭이 아내 마사코에게 보낸 절절한 편지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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